취미/독서

응원을 주는 책! 하루키 에세이『직업으로서의 소설가』

AICO 2023. 7. 21.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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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리뷰로 찾아왔습니다!

 

 

하루키의 책은 많이 읽어보진 않았어요..!

기억나는 건 『노르웨이의 숲』 정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기도 전에 에세이부터 접한 나란 사람ㅋㅋㅋㅋ

 

 

무라카미 하루키 책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다가도

장편소설이라는 심리적인 압박감 때문에 읽질 않았네요 헤헤

 

 

저는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어본 뒤에

오히려 하루키 장편소설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쓰는 방식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신기한 점은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결말을 정해두지 않고

그냥 자기가 재밌는 대로 글을 막 써내려간다고 합니다..! ㅋㅋㅋ

 

저는 소설이라는 건

스토리 구상과 결말을 엄청 오랜 시간 동안 공들인 다음에

얼추 윤곽이 잡혔을 때 글을 써내려가는 건 줄 알았어요.

 

물론 작가마다 소설 쓰는 법은 다르겠지만

하루키의 경우는 결말을 정해놓지 않고

그냥 끌리는 대로 소설을 쓴 다음에

여러 차례 다듬으면서 윤곽을 잡아간다고 해요.

 

이렇게 수차례 다듬는 과정에서

처음 썼던 내용과 완전 다른 내용으로 고쳐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책은 에세이지만, 저한테는 특히 응원을 주는 책으로 다가왔어요.

 

 

제 글을 읽고있는 방문객들도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물론 평범한 사람이구요 :)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대단한 소설가의 에세이었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하루키라는 평범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예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는 천재적인 능력은 없지만

 

  • 지겨운 작업을 끈기 있게 해내는 꾸준함
  •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
  • 매일 조금씩이라도 하는 발전
  • 주변의 악담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에 대한 믿음

 

 

어찌보면 흔하디 흔한 이 능력을 수십 년 동안 쌓아가며

큰 성과를 이루어낸 하루키의 이야기가 나와요.

 

 

그래서 그런지 평범한 사람인 저한테

천재가 아님에도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 같았어요 :-D

 

 

물론 위에서 제가 흔한 능력이라고 말한 것들이

사실은 전~혀 쉬운 능력이 아니지만

그렇게 가타부타 말을 하자면 끝도 없으니 하하

 

 

 


 

 

 

아래는 제가 소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메모 용도로 적어놓은 겁니다 :)

 

 

 

_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

 소설을 쓴다는 건 너무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작업인 것 같습니다. (생략)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상당히 저속의 기어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생략) 어쩌면 소설이란 약간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한 권 쯤은 비교적 술술 써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총명한 사람들이라면 아마 소설 쓰는 작업에서 기대한 만큼의 메리트를 찾지 못했겠지요. 한두 편 써보고 '아, 이런 것이었구나'라고 납득하고 곧장 다른 분야로 옮겨 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소설이 이런 거라면 차라리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이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생략) 소설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몹시 '둔해빠진' 작업입니다. 거기에 스마트한 요소는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이것도 아니네, 저것도 아니네' 하고 오로지 문장을 주물럭거립니다. 책상 앞에서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며 하루 종일 단 한 줄의 문장적 정밀도를 조금 올려본들 그것에 대해 누군가 박수를 쳐주는 것도 아닙니다. 책이 나왔을 때, 그 한 줄의 문장적 정밀도를 주목해주는 사람이라고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바로 그런 작업입니다.

 이 세상에는 일 년쯤 시간을 들여 기다란 핀셋으로 병 속에 세밀한 배 모형을 만든다는 사람도 있지만, 소설 쓰기는 작업상 그것과 비슷한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장편 소설 작업에 들어가면 그런 세세한 밀실에서의 작업이 날이면 날마다 계속됩니다. 거의 끝없이 계속됩니다. 그런 작업이 원래 성품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면, 혹은 그게 그리 고생그럽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소설가라는 종족은(적어도 그 대부분은),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머리가 그리 좋지 않은 사람 쪽에 속합니다. 실제로 내 발로 정상까지 올라가보지 않고서는 후지 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몇 번을 올라가도 아직 잘 모르겠다, 혹은 올라가볼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다, 라는 게 소설가의 천성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소설가는 다른 업종에서 어느 날 천재적인 인물이 훌쩍 찾아와 소설을 쓰고 그것이 평론가나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습니다. 위협을 느끼거나 하물며 화를 낸다든가 하는 일은 없죠.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소설을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써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것을 소설가는 잘 알고 있거든요.

 

 

 

_문학상에 대해서

 나도 인터뷰에서 상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독자입니다. 어떤 문학상도 훈장도 호의적인 서평도 내 책을 자기 돈 들여 사주는 독자에 비하면 실질적인 의미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나 스스로도 지겨울 만큼 수없이 되풀이해서 똑같은 대답을 하는데 거의 아무도 그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생략) 독자가 천몇백 엔 혹은 몇천 엔의 돈을 내고 한 권의 책을 살 때, 거기에는 평판이고 뭣이고 없습니다. 있는 것은 '이 책을 읽어보자'라는 (아마도) 솔직한 마음뿐입니다. 혹은 기대감뿐입니다. 그런 독자 여러분에 대해서는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후세에 남는 것은 작품이지 상이 아닙니다. 이 년 전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을 기억하는 사람도, 삼 년 전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기억하는 사람도 이 세상에 아마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편의 작품이 진실로 뛰어나다면 합당한 시간의 시련을 거쳐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그 작품을 기억에 담아둡니다.

 

 

 

_오리지낼리티에 대해서

 만일 내가 쓰는 소설에 오리지낼리티라는 게 있다면 그건 '자유로움'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소설을 쓰고 싶다'고 지극히 단순하게, 별다른 이유도 없이 불현듯 생각이 나서 처음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래서 별 욕심도 없었고 '소설은 이렇게 써야 한다'라는 제약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당시 문학계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고 존경하고 모델로 삼을 만한 선배 작가도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의 내 마음의 본모습을 비춰내는 내 나름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단지 그것뿐입니다. 그런 솔직한 충동을 몸속에서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책상 앞에 앉아 무턱대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는 게 즐거웠고 나 자신이 자유롭다는 내추럴한 감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나는 삼십오 년 동안 계속해서 소설을 써왔지만 영어에서 말하는 'writer's block', 즉 소설이 써지지 않는 슬럼프 기간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쓰고 싶은데 써지지 않는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재능이 넘친다'는 식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럴 리는 없고요, 실은 매우 단순한 얘기인데, 내 경우에는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을 때, 혹은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지 않을 때는 전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쓰고 싶을 때만 '자, 써보자'라고 마음먹고 소설을 씁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대개는 번역을 합니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기술적인 작업이라서 표현 의욕과는 관계없이 거의 일상적으로 할 수 있고 동시에 글쓰기에 아주 좋은 공부가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내키면 에세이 등을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참 소설을 안 쓰다 보면 '이제 슬슬 써도 될 것 같은데'라는 기분이 들기 시작합니다. 눈 녹은 물이 댐에 고이듯이 표현해야 할 재료들이 안에 축적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날, 참을 수 없어서 책상 앞에 앉아 새 소설을 시작합니다.

 

 

 

_자, 뭘 써야 할까?

 시인 폴 발레리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인터뷰했을 때, 그는 "착상을 기록하는 노트를 들고 다니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온화하지만 진심으로 깜짝 놀란 표정을 보였습니다. 그러고는 "아, 그럴 필요가 없어요. 착상이 떠오르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생략)

 어쨌든 소설을 쓸 때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런 구체적인 세부의 풍부한 컬렉션입니다. 내 경험을 말하자면, 스마트하고 콤팩트한 판단이나 논리적인 결론은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별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발목을 잡아서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저해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뇌 내 캐비닛에 보관해둔 온갖 정리 안 된 디테일을 필요에 따라 소설 속에 그대로 조립해 넣으면, 거기에 나타난 스토리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내추럴하고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이를테면 어떠 것이냐. (생략) 당신이 아는 사람 중에 진지하게 화를 내면 왠지 자꾸 재채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일단 나기 시작하면 좀체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목격했을 때 '왜 저러지? 왜 진지하게 화를 내면 재채기가 나는 거야?'라고 생리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분석 추측하고 가설을 세우는 것도 물론 하나의 접근 방법이겠지만, 나는 별로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머릿속의 활동은 대체적으로 '어, 이런 사람이 있구나'라는 선에서 끝납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이런 이도 있구나'라고. 그리고 그대로 '덩어리째' 쓱 기억해버립니다. 그런 이른바 맥락 없는 기억이 내 머릿속 서랍에는 상당히 많이 수집되어 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이란 기억이다'라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이란 그야말로 맥락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합을 말합니다.

 

 '써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할 경우, 시동이 걸리기까지는 상당히 힘이 들지만 일단 기동력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그다음은 오히려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써야 할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당신이 가진 것이 '경량급' 소재고 그 양이 한정적이라고 해도 조합 방식의 매직만 깨친다면 그야말로 얼마든지 스토리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만일 당신이 그 작업에 숙달된다면, 그리고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깜작 놀랄 만큼 '무겁고 깊은 것'을 구축해나갈 수 있습니다.

 

 묵직한 소재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내측에서 스토리를 짜낼 수 있는 작가라면 도리어 편할지도 모릅니다. 자기 주위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나 매일매일 눈에 들어오는 광경,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소재로서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상상력을 구사하여 그런 소재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스토리를 꾸며나가면 됩니다. (생략) 전쟁이나 투우나 사냥 같은 다이내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어떤 소소한 경험에서라도 인간은 방법 여하에 따라 깜짝 놀랄 만큼 큰 힘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생략) 통상적으로 가벼운 것으로 취급되던 것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획득하고, 일반적으로 묵직하다고 여겨졌던 것이 어느새 그 무게를 잃고 형해만 남습니다. 지속적 창조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시간의 도움을 얻어 그런 과격한 역전을 몰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소재가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약간만 시점을 바꾸면, 발상을 전환하면, 소재는 당신 주위에 그야말로 얼마든지 굴러다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눈길을 받고 당신의 손에 잡혀 이용되기를 기다립니다. 인간의 삶이란 얼핏 보기에는 아무리 시시하더라도 실은 그런 흥미로운 것을 자연스럽게 줄줄이 만들어냅니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게 삼십오 년 전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건 소설이 아니다' '이런 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선행하는 세대에게서 엄격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이 어쩐지 부담스러워서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일본을 떠나 외국의 잡음 없는 조용한 곳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혹시 내가 잘못하는 건가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고 딱히 불안을 느낀 적도 없습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데 뭐, 이렇게 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잖아.그게 뭐가 나빠?' 하고 모른 척 넘어가버렸습니다. 아직은 불완전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좀 더 제대로 된 수준 높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시대도 변화를 달성할 것이고 내가 해온 일은 틀리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증명될 것이다, 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_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장편소설 쓰기

 그런 건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 소설가가 예술가가 아니어서는 안 되는가. 대체 누가 언제 그런 것을 정했는가. 아무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면 됩니다. 우선 '딱히 예술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초고가 완성되면 잠시 한숨 돌리고(그때그때 다르지만 대개는 일주일쯤 쉽니다) 첫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내 경우, 첫머리부터 아무튼 죄다 북북 고쳐버립니다. 여기서는 상당히 크게, 전체적으로 손을 봅니다. 나는 아무리 긴 소설이라도 복잡한 구성을 가진 소설이라도 처음에 계획을 세우는 일 없이 전개도 결말도 알지 못한 채 되는대로 생각나는 대로 척척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그러는 게 쓰는 동안에 단연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쓰다 보면 결과적으로 모순되는 부분,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성격이 중간에 홱 바뀌어버리기도 합니다. 시간 설정이 앞뒤로 오락가락하기도 합니다. 그런 삐걱거리는 부분을 하나하나 조정해서 이치에 맞는 정합적인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상당한 분량을 통째로 빼버리고 어떤 부분은 늘리고 새로운 에피소드를 여기저기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두세 차례의 수정 작업을 거친 후) 그리고 대개 이때쯤에 한 차례 긴 휴식을 취합니다. 가능하면 보름에서 한 달쯤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혹은 잊어버리려고 노력합니다. 그사이에 여행을 하거나 번역 일을 몰아서 하기도 합니다. 장편소설을 쓸 때는 일하는 시간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생략) 그렇게 일단 작품을 진득하게 재운 다음에 다시 세세한 부분의 철저한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진득하게 재운 작품은 나에게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결점도 아주 또렷하게 보입니다. 깊이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됩니다. 작품이 '양생'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머리도 다시 멋지게 '양생'이 된 것입니다.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 나는 소설 쓰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 (중략) 만일 그가 써낸 이야기가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소설 따위를 쓰는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힘껏 일했다는 노동의 증거, 그것뿐이다. 나는 그 친구를 향해 말하고 싶었다. 제발 부탁이다, 지금 당장 다른 일을 찾아봐라, 라고. 똑같이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해도 세상에는 좀 더 간단하고 정직한 일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쏟아부어 글을 써라. 그리고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는 안 돼. 불평하지 마. 핑계대지 말라고.'(졸역 『글쓰기에 대하여』)

 

 

 

_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업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뇌 내에서 태어나는 해마 뉴런의 수는 유산소운동을 통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유산소운동이란 수영이나 조깅 같은 장시간에 걸친 적당한 운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새롭게 태어난 뉴런도 그대로 두면 28시간 뒤에는 별 쓸모도 없이 소멸해버립니다. 정말 아깝지요. 하지만 막 태어난 뉴런에 지적인 자극을 주면 그게 활성화해서 뇌 내의 네트워크와 이어져 신호 전달 커뮤니티의 유기적인 일부가 됩니다. 즉 뇌 내 네트워크가 좀 더 확장되고 촘촘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습과 기억 능력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임기응변으로 사고를 전환하거나 비범한 창조력을 발휘하기가 쉬워지는 것이지요. 좀 더 복잡한 사고를 하고 대담한 발상을 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즉 육체적인 운동과 지적인 작업의 일상적인 조합은 작가가 행하는 종류의 창조적인 노동에는 매우 이상적인 영향을 끼치는 셈입니다.

 

 

 

_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한 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긴 소설을 쓰면 '너무 길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반으로 줄여도 충분하다'라고 하고, 짧은 소설을 쓰면 '내용이 얄팍하다. 엉성하다. 명백히 태만한 티가 난다'라고 합니다. (중략) 불평을 늘어놓는 쪽에서야 간단하겠지만(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릴 뿐 구체적인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말을 듣는 쪽에서는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우선 몸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거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됩니다.

 리키 넬슨이 만년에 발표한 노래 <가든파티>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

 

 이런 기분, 나도 잘 압니다. 모두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봐도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별 의미도 없이 소모될 뿐입니다. 그러느니 모른 척하고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만일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책이 별로 팔리지 않더라도, '뭐, 어때, 최소한 나 자신이라도 즈거웠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즈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멍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 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면 된다는 거야.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건 생각할 것 없어.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서 너를 세상에 이해시키면 돼. 설령 십오 년, 이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말이야."

 

 

 

 나는 순전히 머리만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건 잘 못하는 사람이다. 논리적 고찰이나 추상적 사고에 별로 적합하지 않다. 글을 쓰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면 순서 있게 뭔가를 생각하지 못한다. 피지컬하게 내 손을 움직여 글을 쓰고 그것을 몇 번이고 되짚어 읽어보고 세밀하게 고쳐 쓰는 것에 의해 겨우 나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남들과 비슷한 만큼 정리하고 파악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긴 시간을 들여 이 책에 담긴 글을 써서 모아두는 것으로, 또한 그것을 수없이 손보는 것으로, 소설가인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이 소설가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계통적으로 사고하고 나름대로 부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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