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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 이제야 읽어본 후기!

AICO 2023. 6. 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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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YES24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백세희

 

 

 

 

안녕하세요. aico입니다.

오늘은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리뷰글로 왔어요!

 

 

이미 수 년 전부터 유명했던 책이라 다들 제목은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한창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을 때 읽어보고 싶었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읽게 됐어요 ^^....

 

 

제목만 들었을 때는, 자기계발서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작가의 실제 경험담을 적은 에세이더라고요.

그래서 더욱 가볍고 편한 마음으로 읽기 좋았어요.

 

 

제목처럼 꼭 '죽고 싶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가끔씩 어둠 속에 가라앉는 느낌을 갖는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에 좋은 책 같아요 :)

 

 

 

 


 

 

 

선생님: 감정의 양 끝은 이어져 있기에 의존성향이 강할수록 의존하고 싶지 않아 하죠. 예를 들어 애인에게 의존할 땐 안정감을 느끼지만 불만이 쌓이고, 애인에게서 벗어나면 자율성을 획득하지만 불안감과 공허감이 쌓여요. 어떻게 보면 일에 의존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성과를 낼 때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안도할 수 있으니 의존하지만, 그 만족감 또한 오래가지 않으니 문제가 있죠. 이건 쳇바퀴 안을 달리는 것과 같아요. 우울함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또 노력하고 실패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주된 정서 자체가 우울함이 된 거죠.

 

 

 

나: 남에게 피해 주면 안 된다는, 그런 저만의 기준이 심해진 이후로 강박감이라고 해야 하나, 일상에 불편함이 생겼어요. 예를 들어 버스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거나 전화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치밀이 올라요. 목을 조르고 싶을 만큼요. 실제로 그러지는 못하지만요.

선생님: 죄책감이 들었겠군요.

나: 네. 한두 번 정도는 조용히 해달라고 말을 하지만 열에 여덟 번은 하지 못해요. 그런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심하고요. 회사에서 들리는 키보드 소리에도 예민해져서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고, 소리가 많이 나는 동료에게 직접 이야기하기까지 했어요. 말하고 나서는 후련했고요.

선생님: 시끄럽게 하는 사람한테 조용히 하라는 말을 못 했다고 누가 그렇게 괴로워할까요? 마치 '어떻게 해야 나를 괴롭힐 수 있을까?'의 고민 속에 있는 사람 같아요. 대부분 사람은 비겁해요. 하지만 자신이 비겁하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열 번 중에 한 번이나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자신을 비하하죠.

나: 저는 열 번 중에 열 번을 다 이야기하고 싶어요.

선생님: 그렇게 한다고 행복해질까요? 열 번이면 열 번 다 한다고 '다 나았어, 편해졌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 반응이 다 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사람을 비난할 수 있는데도 굳이 내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거죠. 말을 해봤자 듣지 않을 거 같은 사람들은 피하는 것도 나를 위한 선택이 될 수 있어요. 근본적인 부분을 찾아서 하나하나 정리하는 건 말이 안 돼요. 내 몸은 하나인데, 너무도 큰 역할을 부여하는 거죠.

 

 

 

나: 그리고 저번에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좋은 것들도 많이 널려 있는데 나쁜 증거만 찾아서 사용한다고요. 제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봤어요. 예를 들어 제가 누구한테 차였어요. 그러면 '걔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다가도, 책 내용 중에 '사랑의 모양과 색깔은 다 다르니 네 생각대로만 판단하지마라' 이런 글귀를 보면 '맞아 걔도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겠지, 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을 바꾸다가도 제가 합리화하는 것 같아서 안 하려고 해요.

선생님: 합리화를 왜 부정적으로 보세요?

나: 뭔가 진실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느낌?

선생님: 성숙한 방어기제 중 하나예요. 자신의 상처나 결정에 대해 이유를 찾는 거니까.

나: 나를 지키려는 방법으로 괜찮은 거예요?

선생님: 네.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거죠. 과도해지면 또 다른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얼마든지 좋게 바라볼 수도 있어요.

 

 

 

나: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고치고 있어요. 회사에 친한 친구가 있는데, 서로 힘든 이야기나 감정을 공유해요. 그런데 제가 엄청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태였는데, 그 친구가 자기 이야기를 막 쏟아내는 거예요. 그게 버겁고 힘들었어요. 만약 원래 제 사고회로라면 '아 얘가 나를 얼마나 만만하게 보면 자기 얘기를 이렇게 쏟아낼까. 내가 감정 쓰레기통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괴로워할 거란 말이죠? '난 원래 만만하고 멍청한 인간인가 봐' 이렇게요.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편하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니까 나한테 하는 거지. 만만해서 그런 건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선생님: 조금만 더 틀면 좋겠네요.

나: 어떻게 더 틀어요?

선생님: 자존감을 더 올릴 수 있는 방향으로요. 똑같은 상황이라면 '역시 나 말고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겠구나' 정도까지 생각해도 괜찮아요. 자기 자신한테 하는 말이니까요.

나: 그렇게 거만한 생각을 하라고요?

선생님: 그 자유로움을 좀 즐겼으면 좋겠어요.

 

 

 

[자유 죽음]

 홍승희 작가의 자살 일기 중 자유 죽음에 대한 글을 읽었다. 폐경이 아니라 완경으로 단어를 바꾸는 것처럼 자살을 자유 죽음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 어감, 인상이 매우 부정적인 단어가 많이 있지. 낙태, 폐경, 자살 등등.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선택하는 건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남은 자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삶이 죽음보다 고통스럽다면 기꺼이 그 삶을 끝낼 자유도 존중해주어야 하는 거 아닐까. 우리에게는 애도가 너무 부족하다. 죽은 자에 대한 존중도, 자유 죽음을 택한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사람들, 실패했거나 포기한 낙오자로 여기는 사람들. 정말 끝까지 살아내는 게 이기는 걸까? 애초에 삶에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을까.

 

 

 

"할머니 요새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야?" 묻자 할머니는 매일 혼자 있는데 행복할 일이 어디 있냐고 했다. 맞는 말이네. 머쓱해져서 "내가 와서 행복하지?" 하니까 "응. 기쁘고 좋다"라고 했다. "행복까지는 아닌가 봐?" 하니까 "기쁘고 좋은 게 행복한 거"라고 했다. 할머니만 생각하면 가슴 아픈 게 연민 같아서 싫지만,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낫다. 사랑에서 오는 연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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